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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 니르기의 lover 애우당의 안채

제목 : 러버
작가 : 니르기




니르기는 객관적으로 글을 잘 쓰는 작가이고, 읽는 이의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는데 가히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보기 드문 작가라는 걸 알지만, 사실 나는 그의 단편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 바닥의 많은 작가들이 흔히 그러하듯, 이 작가가 쓰는 단편- 사실 분량상 꽁트라 부르는 게 나을 것이다- 은 하나의 소설이라기보다는 인상적인 이미지의 파편 같은 인상이 강했으니까. 웹에서 본 그의 단편은 하나같이 글이 아니라 이미지로만 다가왔었다. 그럼에도 그의 단편을 구한 것은, 이 작가의 취향이 꽤나 적나라한 방식으로 드러난 글의 모음이란 소리를 어디선가 주워들은 까닭이다. 

작가 스스로도 말했지만, 글을 다 읽고 나니 확실히 알기 쉬운 작가란 생각에 웃음부터 나왔다. 이 작가가 열광하는 비극적 낭만주의, 나도 몹시 좋아한다. 사람인 이상 지극히 높은 곳에서 우아하게 군림하던 이를 맨 바닥으로 끌어내릴 때의 저급한 쾌감을 어찌 모른 척할쏘냐. 만인지상을 끌어내려 능욕하고 모멸감을 심어주고 더럽히고 절망하게 만드는 것만큼 매혹적인 설정도 드물다. 본디 인간이란 패망과 실패의 역사에 깊게 자극받게 마련이고, 모름지기 사람이란 실패자를 좋아하는 법이니까. 오죽했으면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할까. 속물? 천만에, 그게 본성이다, 인간이란 것들의. 역사상 권력자가 시기받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 비극적 낭만주의적 정서가 온갖 글 속에 덕지덕지 묻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본 것은 동양풍 시대물인 [생의 예찬]이고 하나는 마치 제정러시아 후기를 빌린 듯한 [우골리노]였다. 장소도, 시간도, 등장인물도 전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이 두 이야기는 똑같은 이야기다. 그 가상 국가의 위정자인 일리야(키예프 공작)와 임재(왕조의 마지막 국왕)을 위시로 한 구체제에 반하여 일어선 혁명세력의 신예 그리고리(모스크바 공국의 군인인데, 이름이 정말 깬다. 그리고리라니. 미하일 정도면 딱 좋았을 텐데, 이름이 너무 값싸보여, 흑) 와 임정(혁명세력의 거두, 천운을 타고난 왕정의 마지막 왕자), 그리고 그리고리와 임정에 의해 하루아침에 권세를 잃고 능욕당하는 처지에 놓인 그들, 그리고 그에 비극성을 더해주듯 그리고리와 일리야에게는 부자관계라는 비밀이, 그리고 임재와 임정에게는 이복형제지간이라는 근친코드와 첫사랑의 애잔한 코드가 가파르게 바뀌는 운명과 맛나게 버무려져 있다. 일리야도 임정도 비참한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져 온갖 수치와 모멸을 당하지만, 그들이 겪는 아픔과 시련이 사실 내게는 그리 크게 와닿지 않았다. 다이얼 테일에서 그러하였듯이, 여기서도 작가가 만들어내는 낭만적 정서가 글 속에 몰입하기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다. 패망의 굴욕, 그리고 그 굴욕에서 피어나는 찬란한 시련은 내가 보기에 주제의식이 되지 못한 채 글 안에서 설정으로 머무르고 있다는 기분이었달까. 

그것은 내가 조우의 잔을 보고 느낀 기분과 얼추 비슷한 기분이기도 했다. 상당히 아름답지만, 다가서기에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어쩌면 보기 흉한 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는 세련미로 인해 그토록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니르기의 이번 글에서 본 상처는 그야말로 내것이 될 수 없는 타인의 아픔이었다. 그렇기에 작가 역시, 나처럼 어리숙한 독자가 딱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똑같은 소스로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었을 것이고. 동인계에 멸망의 아름다움에 그처럼 주목한 이가 없기에 하는 말이지만, 가볍게 보여주기 위한 정도로서의 설정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가 캐릭터와 함께 살아숨쉬며 처절할 정도로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져 그에서부터 헤어나오려 애쓰는 정통 패망물을 그려주길 바라는 것은 내 과도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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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지나가다 2009/06/13 21:27 # 삭제 답글

    마지막 줄에 공감합니다.
    니르기 님의 글을 읽으면, 아름답고 처절하긴 하지만 독자 입장에선 그냥 '그렇구나...'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쉽습니다. 판 위의 장기말들을 보는 듯한 느낌? 팬이라서 그런지 아쉬움이 더합니다^^;
  • 2009/06/15 12:05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지나가다2 2009/10/26 07:44 # 삭제 답글

    제가 느낀 점을 요목조목 잘 지적해주셨어요. 저도 이분글을 읽으면 늘 10%쯤 부족한데 그것이 뭘까 생각했거든요. 인물들마저 비극적 낭만주의를 위한 소도구, 악세사리 같아요. 감상을 읽다보니 정통패망물이 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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